ジイ・ガントフタの歴史

지이 간토프타의 역사

20세기 스웨덴에서는 도판이 많이 제조되었습니다.

도판은 일본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지만, 구이를 회화적으로 장식물로 하는 문화가 북유럽에는 있습니다.

덴마크제나 핀란드제의 도판도 있습니다만 특히 스웨덴에서는 매우 많은 수의 도판이 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그 가마의 하나였던 지이 간토프타의 소사를 접해 보겠습니다.

또한 간토 뚜껑의 스웨덴어로 올바른 발음은 "예 갸토후타"입니다.

스웨덴어는 J의 소리는 Y와 마찬가지로 야행의 발음이 됩니다.

여기에서는 관용적으로 지이 간토 뚜껑이라고 부릅니다.

간트프타는 1942년 덴마크에 국경을 접하는 스웨덴 남서부의 항구 마을 헬싱보리에서 창업했습니다.

창업자는 John Ewert Johnson(영예예 영성)이라는 인물로 애칭이 Jie(예)였습니다.

당초는 AB Jie Johnsons Keramiska Fabrik(주식회사 예영성 도기 공방)이라는 사명이었지만, 2년 후인 1944년에는 생산 확대에 따라 헬싱보리시의 내륙부에 있는 Gantofta(간토프타)라는 지역에 공방 를 이전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지이 갠트프타라는 사명이 성립한 것 같습니다.

Jie_Gantofta

(사진:간토후타사의 로고)

이전한 이유로는 공방에 큰 부지를 필요로 한 것 이외에, 구이에 적합한 도토가 입수하기 쉬운 환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지만, 두번째 세계대전을 통해 스웨덴은 중립을 관철하고 있습니다.

북유럽은 일반적으로 20세기 중엽에는 가난한 나라였지만 전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문화적인 축적이 당시 얻어진 것이 그 후의 북유럽 모던의 역사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실은, 창업 당초의 간트 뚜껑은 접시나 컵이나 조미료 넣어 등의 센기를 중심으로 제조하고 있었습니다.

Gantofta_Plate_Ella Bergstrand

(사진 : 1950년대에 제조된 Gantto 뚜껑의 플레이트)

이 판은 초기에 재적한 디자이너 Ella Bergstrand (엘라 벨그 스트랜드)에 의해 디자인 된 것입니다.

유약의 색상이 선명하고 깊이가 있고 핸드 페인트로 정성스럽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당시에는 수작업으로 모든 공정이 이루어졌습니다.

또 다른 유명한 디자이너는 Anita Nylund (애니타 니룬드)입니다.

아니타 니룬드의 아버지는 북유럽을 대표하는 대도예가의 Gunnar Nylund(군나 니룬드)입니다. Anita는 리사 라슨과 같은 해의 디자이너로, 수도 스톡홀름에 있는 Otte Skölds målarskola라는 회화의 전문 학교에서 배우고, 한때 파리에 건너간 갠트프타사에 취직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디자인의 특징은 민족적인 무늬를 이용한 Janssons frestelse(양손씨의 유혹)나 Familjen Pepparsson(페퍼씨의 일가)등이 알려져 있습니다. 어쨌든 그녀의 디자인도 식기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Anita_Nylund

(사진: 아니타 니룬드가 디자인한 3개 다리의 용기)

전기가 방문한 것은 Aimo Nietosvuori (아이모 니에토스부오리)의 등장이었습니다.

당시 스웨덴의 도자기 메이커는 Gustavsberg(구스타프스베리)와 Rörstrand(롤 스트랜드)가 이름을 터뜨리고, 이웃 핀란드에서는 ARABIA(아라비아)가 대두하는 등, 20세기 중반의 북유럽의 도예 무브먼트는 미드 센추리라고 불리는 황금 계기에 돌입했습니다.

도기를 취급하는 메이커에게 있어서는 바로 군웅할거의 시대였습니다.

간트 뚜껑도 그런 방침 전환을 강요당한 것 같습니다.

1967년에 입사한 아이모·니에토스부오리는 처음 촛불 스탠드 등의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만, 전속의 디자이너로서 형 밀식의 도판을 고안했습니다.

형 밀기식이란 목형에 점토를 밀어넣어, 형성한 점토를 한 번 구워서 소구이의 도판을 만듭니다. 그리고 표면에 페인트처럼 유약으로 착색을 풀어 재소성하여 정착시키는 공정을 밟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은 그림 같은 인테리어 작품을 양산할 수 있게 됩니다.

Aimo_Nietosvuori

(사진:니에토스부오리의 들 딸기의 도판)

같은 시기에 활약한 간토프타의 디자이너에는 Annika Kihlman(안니카·킬만)이 있습니다만, 키르만의 작풍은 헤라로 형성하는 도예에 가까운 작풍의 도판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디자이너에 의해 미묘한 제작 공정의 차이를 읽을 수 있습니다.

Annika Kihlman

(사진 : 헤라의 흔적이 보이는 킬만 도판)

니에토스부오리의 등장을 계기로 간토후타사의 제품은 거의 100%라고 해도 좋을 정도 도판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제작된 것은 스웨덴의 주 꽃 시리즈와 도판 시계, 북유럽 풍경의 도판 등입니다.

(사진 : 간토 뚜껑의 주 꽃 시리즈의 도판)

일련의 시리즈 디자이너는 거의 니에토스 부오리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주로 도판의 정면 오른쪽 아래와 뒷면에 니에토스부오리의 사인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의 디자인 한 도판의 수는 1,300점 정도에 올라갑니다.

다만 이러한 모노폴리화된 생산 체제는 세상의 흥미 관심에 실적이 크게 좌우됩니다.

1960년대 후반에 도판을 발매해, 70~80년대에는 나름대로 실적을 유지한 것 같습니다만, 북유럽이 경제 위기에 처해진 1990년대가 되어 간트프타사에도 불황의 파도가 밀려들게 합니다.

예술에는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불황의 때만큼 예술적인 것의 가치는 떨어집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그동안 북유럽의 대표적인 도기 메이커도 잇따라 사업을 축소해 해외로 생산 거점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간트 뚜껑은 1992년 12월에 운영을 중단합니다.

그 후는 해외로 생산 거점을 옮기려는 시도도 행해진 것 같습니다만 결국 잘 가지 않았습니다.

이 해는 창업으로부터 단지 반세기의 고비였습니다.

Aimo Nietosvuori Signature

(사진 : 간토 뚜껑의 포장마차를 지지한 니에토스부오리의 사인)

간트 뚜껑이 도판을 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92년까지입니다.

실질적으로는 20년 수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일시기는 꽤 대히트한 것 같습니다.

현재도 골동품 시장에서는 수많은 간토 뚜껑 도판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를 통해 도판에는 같은 목형이 사용되고 있어 연대에 의한 디자인의 차이는 기본적으로는 없습니다.

단지 후기의 작품이 될수록 유약의 발색이 형광색에 가까운 밝은 색이 되어 갑니다.

유약의 원료에도 다양한 시행 착오가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 느껴집니다.

older and newer version of Snake's head

(사진:동 모델의 초기 작품【왼쪽】과 후기 작품【오른쪽】)

또한 당초에는 초구이의 면적이 큰 도판이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시대가 후기가 될수록 정면에는 전면적으로 끈적 끈적한 유약을 바른 도판으로 시프트 해 갑니다.

아마 초밥 구이의 부분이 더러워지기 쉽거나 햇볕에 녹기 쉬운 등의 클레임이 많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초밥 구이 부분에 묻은 얼룩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snow landscape

(사진 : 도토의 백색을 살린 초기의 간토 뚜껑의 설국의 도판)

하지만 도판은 회화와 달리 기본적으로 열화되지 않습니다.

유약에 갇힌 색은 영원한 것입니다.

한층 더 햇볕이나 더러움에 조심하면 수십년이나 100년 단위로 후세에 계승합니다.

나머지는 떨어뜨리지 않게만 조심하면 도판은 평생 즐길 수 있는 인테리어입니다.

이 기회에 꼭 당점의 도판 컬렉션 을 봐 주세요.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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